1세대 현대 투싼의 탄생과 유산
베이비 산타페에서 글로벌 베스트셀러까지
투싼이 나오기 전 한국 SUV 시장을 떠올려 봅시다. 쌍용 렉스턴, 현대 테라칸, 기아 쏘렌토. 우락부락하고 무거운, 바디온프레임 방식의 차들이 주류였습니다. 산에 가야 할 것 같고, 험지를 뚫어야 할 것 같은 느낌. 가벼운 마음으로 타기엔 좀 부담스러운 친구들이었습니다.
미니밴 쪽에는 카렌스, 트라제XG 같은 차들이 있었습니다. 가족용으로 인기는 있었지만, 디자인이 둔하고 운전 재미가 없다는 평이 많았습니다.
현대차는 이 수요를 읽었습니다. 25개월간, 약 2,100억 원을 투자해서 만든 차가 바로 투싼입니다. 결코 작은 베팅이 아니었습니다. 이 한 대에 사활을 걸고 있었던 겁니다.

투싼이라는 이름은 미국 애리조나 주 남동부의 휴양 도시 Tucson에서 따왔습니다. 사막 한가운데 있는데 기후가 쾌적하기로 유명한 도시입니다. 이때부터 자리 잡은 현대·기아의 SUV 작명 전통이기도 합니다.
재밌는 건 일본 시장입니다. 일본에서는 상표권 문제로 투싼이라는 이름을 쓸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이 코드명이라고 부르던 프로젝트명 JM이 그대로 차명이 됐습니다. 일본 소비자들에게는 JM이 정식 차 이름이었던 거죠.

투싼이 이전 SUV들과 달랐던 결정적인 이유는 아반떼 XD의 전륜구동 플랫폼, 즉 모노코크 바디를 채택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당연한 개념이지만 그때는 꽤 신선했습니다. 먼저 나왔던 1세대 싼타페가 길을 열어줬고, 투싼이 그걸 한 사이즈 작게 줄여서 대중적으로 안착시킨 모델이었습니다.
전장 4,325mm (산타페 4,500mm보다 175mm 작음)
휠베이스 산타페보다 오히려 10mm 더 길었음
엔진 2.0L 디젤 / 2.0L 가솔린 베타 / 수출형 V6 2.7L
변속기 수동 5단 / 자동 4단
출시 가격 1,452만 원~
출시 직후 붙은 별명이 '베이비 산타페'였습니다. 동그란 헤드램프, 네모진 그릴, 굴곡진 보닛, 차체 옆구리의 플라스틱 가니쉬까지 싼타페를 거의 그대로 축소한 느낌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이게 마냥 깎아내리는 별명만은 아니었습니다. 싼타페 디자인이 워낙 인기가 좋았기 때문에 그 흐름을 이어받은 투싼도 비슷한 호평을 받았습니다. 특히 견고한 휠 디자인과 듀얼 머플러 팁이 세련된 느낌을 더했다는 평이 많았습니다.

투싼 얘기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차가 있습니다. 2세대 기아 스포티지입니다. 같은 시기 출시된 투싼의 형제 차. 같은 플랫폼, 같은 엔진, 같은 변속기, 거의 모든 부품을 공유했습니다.
문제는 디자인이 너무 비슷해서 소비자들이 헷갈렸고, 스포티지는 1991년부터 이어진 역사가 있었다는 겁니다. 신생인 투싼보다 네임 밸류에서 불리했습니다. 스포티지로 빠지는 손님도 적지 않았어요.
1세대 단일 모델로 글로벌 누적 100만대를 넘긴다는 건, 그 나라 일상에 그 차가 녹아들었다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영화와 뮤직비디오에 PPL이 아닌 방식으로 등장합니다.
LMFAO 셔플 댄스 뮤직비디오 — 1분쯤, 차 뒤에 숨는 장면에 1세대 투싼 은색 모델이 등장. 미국에서 그만큼 흔하게 보이는 차였다는 증거
다크 나이트 라이즈 — 조셉 고든 레빗이 연기한 존 블레이크가 타는 차가 1세대 투싼 초기형. PPL이 아님. 제작진이 직접 구해서 썼고, 고아원 출신 가난한 처지를 보여주는 소품으로 쓰인 것
MBC 게임 팀리그 4차 시즌 스폰서 — 투싼이 스폰서로 들어갔고, 우승팀에 투싼을 지급. 대회 공식 맵 이름도 '투싼'. SKT T1에게 우승 상품으로 지급된 그 차
도심형 SUV의 대중화. 험로용 SUV 밖에 없던 한국 시장에 '승용차처럼 모는 SUV'가 가능하다는 걸 증명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SUV 하면 떠올리는 그 이미지 — 마트, 캠핑, 출퇴근을 동시에 하는 차의 원형이 여기서 시작됐습니다. 1세대 투싼이 없었다면 셀토스, 코나, 트레일블레이저도 이렇게 자연스럽게 나오지 않았을 겁니다.
글로벌 베스트셀러로의 도약. 투싼이라는 이름이 글로벌 시장에서 통한다는 걸 1세대가 증명했습니다. 2세대가 ix35라는 이름으로 유럽에서 더 큰 인기를 끌고, 3세대부터 다시 투싼이라는 이름으로 통일되면서 글로벌 베스트셀러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기반이 여기에 있습니다.
수소차의 출발점. 2004년 제네바 모터쇼에서 투싼 기반 수소연료전지차가 공개됐습니다. 지금 현대차 친환경 라인업의 한 축인 수소차, 그 흐름의 시작점이 1세대 투싼이었습니다. 넥쏘의 뿌리입니다.
처음에는 베이비 산타페라고 불렸던 그 차가, 결국 현대차 SUV 중 최초로 글로벌 천만 대를 달성한 가문의 시조가 됐습니다.